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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부정공>석재공휘동선묘갈명(石齋公諱東璿墓碣銘)
石齋公諱東璿墓碣銘 噫吾友石齋之歿忽己七年耳以若傑然秀拔之像闇然晦養之態悃愊而不華持重而不搖使人可敬如余躁遽淺露每心欲效之而不可得至今思之只切隔世之恨誰意今日以公哲嗣春容之託擔公萬年之役耶悲夫公諱東璿字重吾趙氏遠有來歷至農隱公諱元吉勳封玉川府院君子孫遂以是爲籍生諱瑜號虔谷我太祖龍興入社門洞屢徵不出至世廟旋之爼豆于謙川院孫曰智崙號相好亭相好之曾孫曰大成號梅窓曲水武曲兩祠妥靈生諱恰號蓮潭自順天移居浴川曳山曰洙曰昌灌高曾諱祖諱章燮號韋堂學行鳴世考諱敏植號一軒世其學皆文集行于世妣順興安氏晦軒裕后榮鎭外祖高宗癸卯公生于梧枝里第五兄弟序居二卒壬子正月十五日墓梧枝里案山坤坐原其藏配寧川李氏圭漸女墓書附左配海州呉氏弼洙女有婦德男春容寅容女適朔寧崔成文前配只此女密陽朴炳熙淳昌薛在玉曲阜孔炳吉全州李正基雲翼良翼貞翼康翼順翼長房出章翼次房出外孫若干人餘幼不盡錄吾與石齋雖交晚逢稀知心志則深且密耳晚而稀故其行治之詳未得以盡惟其知心志故可因略而致詳爾盖公自結뮚志學至老成德凡七十年其間東潮西波巳承魍魎百恠千燮充天塞地而能毅年中立不降志辱身保冠뮚守一心而盖棺大者既如此則其他如言語行止辞受取予應事接物等皆此中事而況孝友之至行有贊揚之表賞學業之早成而有敎育之懿蹟乎盖古之遯世不悔獨善其身之君子也歟銘曰名祖有韋堂一軒又賢父君能承先武不杤在於斯 己未榴月念日 竹山 安秉析 撰 석재공휘동선묘갈명(石齋公諱東璿墓碣銘) 아! 내 친구 석재(石齋)가 돌아가신 지 어느덧 七年이 되었다. 공의 걸출(傑出)하고 뛰어난 모습, 조용하고 교양(敎養)있는 모습, 진실하면서도 잘난 체하지 않고 장중(莊重)하면서도 흔들리지 않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친밀감과 존경심을 자아내게 하였다. 매양 행실에 경박(輕薄)함이 드러난 나는 그래서 공을 본받으려고 했으나 되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있다. 그런데 내가 공의 아들 춘용(春容)의 부탁을 받고 비문을 지을 줄 누가 알았으랴? 안 슬프다. 공의 휘(諱)는 동선(東璿), 자는 중오(重吾)이다. 조씨의 집안은 내력이 오래이다. 농은공(農隱公) 휘 원길(元吉)에 이르러서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훈봉(勳封)되어 자손들이 이때문에 본관(本貫)을 삼고 있다. 이분이 휘 유(瑜)를 낳았는데, 호가 건곡(虔谷)으로 조선(朝鮮)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우자 절의를 지켜 두문동(杜文洞)으로 들어갔는데, 나라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세종(世宗)때 정려(旌閭)를 내려 겸천사(謙川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손자가 지류(智崙)인데 호가 상호정(相好亭)이며, 상호정의 증손이 대성(大成)인데 호가 매창(梅窓)으로 곡수사(曲水祠)와 무곡사(武曲祠)에 배향되셨다. 이분이 휘 이(怡)를 나셨는데 진사(進士)로 호가 연담(蓮潭)이며 순천에서 곡성 예산(曳山)으로 이사하셨다. 휘 수(洙), 휘 창관(昌灌)이 고조와 증조이며, 할아버지 휘 장섭(章燮)은 호가 위당(韋堂)인데 학문과 행실로 세상에 알려졌고, 아버지 휘 민식(敏植)은 호가 일헌(一軒)으로 부조(父祖)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며, 모두 문집(文集)이 세상에 행하고 있다. 어머니는 순흥인(順興人) 안영진(安榮鎭)의 따님으로 회헌(晦軒) 안유(安裕)의 후손이다. 公은 고종(高宗) 一九○三(癸卯) 오지리(梧枝里) 집에서 태어나셨는데 다섯 형제 가운데 둘째아들이다. 임자년 정월 十五일에 돌아가셨으며, 묘소는 오지리 안산(案山) 곤좌(坤坐) 언덕이다. 배위 영천이씨(永川李氏)는 규점(圭漸)의 따님으로 졸하였는데 묘는 부좌(祔左)이다. 배위 해주오씨(海州呉氏)는 필수(弼洙)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으셨다. 아들은 춘용(春容), 인용(寅容)이며 딸은 삭녕인(朔寧人) 최성문(崔成文)에게 출가하였는데 이씨 소생이다. 밀양인(密陽人) 박병희(朴炳熙), 순창인(淳昌人) 설재옥(薛在玉), 곡부인(曲阜人) 공병길(孔炳吉), 전주인(全州人) 이정기(李正基)에게 출가한 딸은 오씨의 소생이다. 손자 운익(雲翼), 양익(良翼), 정익(貞翼), 강익(康翼), 순익(順翼)은 춘용의 소생이요, 장익(章翼)은 인용의 소생이며 외손(外孫) 몇 명이 있으나 다 기록하지 못한다. 吾가 비록 석재와 만년(晩年)에 만나 사귀었으나 서로를 알고 친밀하였지만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만년에 알고 만나는 것이 드물었기 때문에 공의 행적을 모조리 알 수는 없으나 그분의 뜻을 알기에 그동안 동서양(東西洋)의 세력이 밀려와 날뛰고 갖은 변란(變亂)이 많아 천지에 가득찼지만 항상 의연(毅然)하게 우뚝서서 뜻을 굽히거나 몸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갓과 상투를 죽을 때까지 일심으로 지켰으니 나머지 언어와 행동, 주고 받는 일, 남을 대접하는 일 등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한 것으로 찬양(贊揚)받아 상(賞)을 받았고, 학업(學業)이 일찍 성취되고 남을 교육한 아름다운 행적(行蹟)은 옛날 은둔(隱遁)하여 몸가짐을 깨끗이한 군자(君子)가 아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한다. 할아버지는 유명한 위당이요 名祖有韋堂 또 어진 일헌이네 一軒又賢父 그대 선대의 발자취 이어받아 君能承先武 그 명성 떨어지지 않게 했네 不杤在於斯 己未年 五月 二十日 죽산(竹山) 안병탁(安秉柝)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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